제4땅굴,을지전망대
서부전선 지역에 2개(제 1호, 제 3호 땅굴),
중부전선 지역에 1개(제 2호 땅굴),
동부전선 지역에 1개(제 4호 땅굴).
제 4호 땅굴이 발견되면서 북한이 전 전선지역에서 남침용 땅굴을 굴설 하였음이 입증되었다.
특히, 1975년에 발견된 제 3호 땅굴은 서울에서 불과 44km거리에 있는 위협적인 존재였다.
남침용 땅굴은 1971년 9월 25일 “하나의 갱도는 10개의 핵 폭탄 보다 효과적이다”이라는
김일성의 교시로 1972년 5월부터 공사가 이루어졌고
이로부터 2년 후 1974년 11월 15일 경기도 파주시 고랑포 비무장지대 내에서 최초로 남침용 땅굴이 발견된 것이다.
특히, 이곳은 1968년 1월 21일 청와대 기습을 위해 남파된 무장간첩이 침투한 인근지역이기도 하다.
1974년 11월5일 고랑포에서 동북방 8km 지점 비무장지대 안에서 발견된
이 첫 번째 땅굴은 휴전선 남방한계선을 불과 800m 남겨놓은 지점에서 발견되었다.
이 땅굴의 위치는 서울에서 불과 65km 거리로서, 그 규모로 보아 1시간에 1개 연대이상의 무장병력이
통과할 수 있는 규모의 땅굴이다.
제1땅굴은 비무장지대내에 있는 관계로 외부에 개방되지는 않고 있다.
1974년 11월15일 땅굴 수색 중 북한의 방해 매설물로 인해
한ㆍ미군 장교 2명이 사망하고 6명이 부상하는 희생을 치루었다.
1975년 3월19일에 발견된 제2땅굴은 제1땅굴보다 규모가 큰 것이다.
철원 북방 13km지점 비무장지대 안에서
발견된 이 땅굴은 대규모 병력을 집결시킬 수 있는 광장까지 갖추어 놓았고,
출구는 세 갈래로 분산시켜 놓았다.
1시간에 3만명의 무장병력을 이동시킬 수 있으며, 차량ㆍ야포 등과 함께 탱크까지 통과할 수 있는 규모이다.
제2땅굴 수색 중에도 북한의 방해대책 강구로 한국군 7명이 희생되었다.
1978년 10월17일에 발견된 제3땅굴은 제2땅굴과 거의 같은 규모이다. 판문점 남방 4km지점 비무장지대 안에서
발견된 이 땅굴은 아치형으로 1시간에 3만여명의 무장병력을 이동시킬 수 있는 규모이다.
제3땅굴은 제1,2땅굴보다 휠씬 위협적이다.
위치가 임진각에서 서북쪽으로 4km, 통일촌 민가에서 3.5km밖에 안되는 곳으로서
서울까지는 불과 44km
거리에 있기 때문이다.
1990년 3월3일에 발견된 제4땅굴은 양구 동북방 26km 동부전선 비무장지대의 지하 145m 깊이에 폭 2m,
전체길이가 2,052m나 뻗어 있으며, 군사분계선에서 무려 1,502m나 남쪽에서 발견되었다.
제4땅굴은 북한이 전 전선에 걸쳐 남침용 땅굴을 굴착하였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제4땅굴의 견학은 여느 땅굴과 달리 밧데리 열차가 운행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제 4땅굴은 북한의 새로운 침투 방법으로 모색되어 굴설된 땅굴로 1978년 제3땅굴이 발견된
지 12년 만인 1990년 3월 3일에 양구 동북쪽 26㎞ 지점 비무장지대 안에서 발견되었으며 군
사분계선에서 1.2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그 규모는 높이와 폭이 각 1.7m, 깊이가 지하 145m이며, 총 길이는 2,052m로서 지난 1974
년 고랑포 동북쪽 8km지점에서 발견된 제 1땅굴의 높이 1.2m, 폭 0.9m, 길이 지하 46m와 비
교해 볼 수 있다.
육군 백두산 부대는 땅굴 발견 이후, 1992년 2월까지 37억원을 들여 안보기념관과 기념탑을
세우고 갱도 및 갱내시설을 설치해 안보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땅굴 출입구에는 발견당시 땅굴을 수색하던 중 북한군이 설치한 수중지뢰에 의해 산화한 군
견을 위로하는 충견비가 세워져 있고, 땅굴 내부에는 투명유리 덮개로 덮힌 15인승 전동차
가 운행되고 있어 앞서 발견된 1,2,3 땅굴에 비해 매우 편리하게 관람할 수 있으며,
또한 땅굴 내부에 화강암층을 통해 흘러내리는 비무장지대의 오염되지 않은 지하수를 마실
수 있는 기회도 가질 수 있다.
4땅굴 안보관 오르기전
탑 아래는 대통령표장문이 새겨져 있다.
1990년 발견당시 대통령 노태우.
을지전망대는 짙은 안개와 비때문 시계 제로상태.
아무것도 볼수 없었고,
뒤로 보이는 펀치볼지구의 멋진 풍경도 고스란히 놓아두고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