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

거창사건 추모공원

피코7 2008. 4. 13. 09:13

거창!

거창군 신원면!

학살의 참혹함을 평화의 기원으로....

2008년4월12일 황매산 산행귀가길에 거창사건추모공원을 들렀다.

우리현대사의 비극인 6.25중  1951.2.9~2.11까지  일부국군에 의해 자행된 민간인 학살에 대한

그분들의 넋을 위로하고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조성된 추모공원이다.

사건 개요.(거창사건관리사업소 홈페이지글 인용)

1951년 2월 9일 신원면 덕산리 청연골에서 주민 84명 학살
2월 10일 대현리 탄량골에서 주민 100명 학살
2월 11일 과정리 박산골에서 주민 517명 학살
2월 9일 ~ 2월 11일 기타지역에서 주민 18명학살 등


『일부 미련한 국군』에 의해 719명이 학살된 거창양민학살사건은
15세 이하 남녀 어린이가 359명, 16세 ~ 60세가 300명, 60세 이상 노인이 60명(남자 327명, 여자 392명), 무고한 양민 719여명이 당시 11사단(사단장 최덕신 준장), 9연대(연대장 오익경 대령), 3대대(대대장 한동석 소령) 병력의 총검에 무지막지하게 학살되어, 처참한 시신위에 마른 나무와 기름을 뿌려 불로 태워 버리기까지한 천인공노할 사건을 저질러 놓고 후한에 두려움을 느낀 한동석은 신원면 일원에 계엄령을 내려, 이방인 출입을 막고, 어린이 시체는 골라내어 학살 현장에서 약 2㎞ 떨어진 홍동골 계곡으로 옮겨 암매장하여 은폐를 하고, 공비와 전투를 하여 희생자가 발생된 것으로 왜곡을 하였으나,

1951년 3월 29일 거창 출신 신중목 국회의원에 의해 국회에 폭로되고, 1951년 3월 30일 국회와 내무 · 법무 · 국방부의 합동진상조사단이 구성되어 1951년 4월 7일 합동진상 조사단이 신원면 사건 현장으로 오던 중 길 안내를 맡은 경남 계엄민사부장 김종원 대령은 신성모 국방 장관과 사전에 모의하여 9연대 정보 참모 최영두 소령의 수색 소대로 하여금 군인을 공비로 위장 매복시켜, 거창읍에서 신원면으로 통하는 험준한 계곡의 길목인 수영더미재에서 합동진상조사단에게 일제히 사격을 가해 조사를 못하고 되돌아 가게 하는 등 국방의 의무를 진 군인으로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만행에 대하여,

1951년 7월 27일 사건발생 5개월여만에 대구고등군법회의는

「재판장에 강영훈 준장, 심판관에 정진환 준장, 이용문 대령, 법무관에 이운기 중령, 검찰관에 김태청 중령, 김부남 소령, 김동수 대위」로 심판부를 구성하여,

1951년 12월 15일 구형공판에 이어 동년 12월 16일 판정판시에서 9연대장 오익경 대령 무기징역(구형 사형),
3대대장 한동석 소령 징역 10년(구형 사형), 소대장 이종대 소위 무죄(구형 징역 10년), 계엄민사부장 김종원 대령 징역3년(구형 징역 7년)으로 관련 군지휘관에게 실형이 확정 되므로서 책임이 국가에 있는 거창양민학살사건은 희생자와 유족에 대해 잘못을 뉘우치기 는 커녕 기회만 생기면 탄압을 가했다.

1961년 5.16 군사정부는 5월 18일 유족회 간부 17명을 반국가 단체로 몰아 투옥을 시키는 등 동년 6월 25일 경남지사 최갑중은 당시 학살현장 접근이 어려워 3년여만에 유골을 가매장할 때 앙상한 뼈로서는 성별 구별을 할 수가 없어 큰뼈는 남자, 중간뼈는 여자, 작은뼈는 소아로 구분, 화장하여 517기를 합장하여 놓은 박산합동묘소에 개장 명령을 내려, 천신만고 끝에 만들어진 묘역을 파헤쳐서 유족들은 뼈가루와 흙한줌으로 조부, 조모, 부모, 형제, 자매에 유골로 대산하여 거주지 공동묘지에 개인별로 개장하라 하였으며, 위령비는 글자 한자 한자를 정으로 지워서 땅속에 파묻어 제2의 학살인 부관참시를 당한 사건이 거창 양민학살사건이다.

 

 

추모문.  

 천유문

 안내도

 천유문을 지나면 위령탑으로 가는 광장

 위폐봉안각

 위령탑

1. 규모 :
2. 설명 :

높이 18m
거창사건으로 희생된 남자, 여자, 어린이의 무덤을 상징하는 3단의 돔 사이로 영혼이 부활하여 어둠을 뚫고

 하늘로 오름을 상징합니다

 공원내 조성된 연못.

 

1951. 02. 05

국군 11사단 9연대 3대대장 한동석소령이 인솔하는 병력이 처음 신원면에 들어왔을 때,

마을에는 어린이와 부녀자 노약자들만 남아 있었는데 한동석은 마음내키는대로 총기를

난사하며 노약자까지 군수물자 운반에 강제로 동원시키며 살벌하게 신원면을 빠져나갔다.

1951. 02. 09

재차 신원면 청연마을에 들어온 한동석 소령과 3대대 병력의 행동이 광란으로 돌변,

이유나 영문도 없이 닥치는 대로 전마을을 방화하고, 전 주민들을 마을앞 눈이 쌓인 논들로 끌어내어

소충과 기관총으로 무차별 난사 학살하고 순식간에 백설이 덮힌 논들은 피바다로 온 마을은 불화성을

만들었다.

1951. 02. 10

한동석은 덕산리 내동에서 밤을 보내고 아침일찍 과정리 면소재지로 이동해 군병력을 대현리,

와룡리, 중유리 마을에 투입해 마을마다 가옥은 불질러 태우고 가축과 양식을 강탈하며 무법 천지로

 만들어 주민들을 총으로 위협하여 과정리로 몰아가던 중 날이 저물자 와룡리, 대현리 주민 100여명을

탄량골 하천 계곡에 몰아 넣고 총으로 처참하게 학살, 시신위에 나무가지를 덮고 불을 질러 태워 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1951. 02. 11

한동석은 10일날 3개리에서 끌고온 주민 1000여명을 신원국민학교 교실에 몰아넣고 굶주림과 추위,

공포에 질려 있는 주민들에게 (인공가 불러라.) 군가 불러라, 밤새도록 교대 해가며 광란을 부리다

날이 밝아질 때 주민 517명을 박산골짜기에 몰아넣고 전투에 사용되는 무기는 모두 사용하여 잔인하게

 학살을 하고 피바다를 이룬 시신위에 마른나무 가지를 올려놓고 기름을 뿌려 불로 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3일간 세곳에서 희생된 주민이 719여명이다.

1951.2.9~2.11   3일간 자행된 .....

 

 좌측군상 (테마 : 참회)

1. 규모 :
2. 설명 :

좌대 1.5m 군상 2.5m
고인들에게 심대한 피해를 끼친 국군들이 진심으로 영령들과 유족들에게 참회하는 모습을 환조로 표현

 

 

 

 

우측 군상 (테마 : 환희)

1. 규모 :
2. 설명 :

좌대 1.5m 군상 2.5m
후손들의 정성어린 위로속에 한을 풀고 승천의 기쁨을 만끽하는 영령들과 유족들을 환조로 표현

 

 이렇게 까지는 엄청난 인고의 세월이 있었다.

 

 묘역에는  졸1951.2.9~2.11로  세겨져 있다.

 

 

 이제는 뜻뜻하게 태극기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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